Archive for January, 2009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페이퍼를 위해서 책을 읽다가 흥미 있는 이야기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사막의 구도자들이 진리와의 대화 속으로 깊이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찾아와 제자가 되고자 했다.
그들이 주었던 가르침의 내용과 방법은 무수한 일화와
이야기의 형태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도 이 이야기 속으로 우리의 마음과 지성을 가지고
들어간다면, 사막 스승들은 우리에게도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들의 말에 적극적으로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교육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앎과 가르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바(교부) 펠릭스(Abba Felix)와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다음 이야기를 들어 보라.

몇몇 형제들이 아바 펠릭스를 찾아가서 말씀을 해 달라고 간정했다.
그러나 노인은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오랜 동안 간청을 하자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가?”
그들은 대답했다.
“아바시여, 그렇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다네. 사람들이 노인들을 찾아가
말씀을 청하고 또 자신이 들은 말을 실천했던 때에는, 하나님은
노인들에게 할 말씀들을 주셨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말씀을 청하고서도
들은 것을 행하지 않기에, 하나님은 노인들로부터 말씀의 은총을 거두어
들이셨네. 그래서 이제 그들은 아무런 말씀을 갖지 못하게 되었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라네.”
이 말을 듣자 형제들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바시여,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제자들은 말씀을 듣고자 아바 펠릭스를 찾아간다. 그런데 그 교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그는 침묵을 지킨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
그는 교사가 지녀야 한다고 여겨지는 재빠른 말솜씨로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은혜를 값싸고 헤프게 내어 주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 모험,
권위 있는 말로 온통 채울 것으로 기대되는 장소에서 오히려 긴장과
당혹스러움을 말들어 내는 모험이 그것이다. 아바 펠릭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에도, 그 말은 오히려 침묵을 강화시켜 줄 뿐이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말씀이 없다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Parker J. Palmer 저, IVP 출판, p.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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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하나님의 뜻’이라는 도피처

 

시대의 분닥세인트들과 나누는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하나님의 뜻’이라는 도피처

  

박총 전도사(복음과상황 편집위원, [밀월일기] 저자)

 

 예수 믿는 이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마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새해에는 평소보다 더 간곡히 우리네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지요. 이와 관련해 얼마 전 한 독자님의 홈피에서 발견한 사진 한 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뜻과 하나님 사이에서

  눈에도 은혜가 되고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퍼가요~♡’ 남기며 얼른 담아가고픈 사진입니다. 하나님의 볼륨만 ‘on’으로 해놓고 나와 세상의 볼륨은 ‘off’ 시켜 놓으라는 의도는 누구든 충분히 이해가 될 겁니다. 근데 노파심인지는 몰라도 몇 가지 문제가 맘에 걸리는군요.

 먼저 하나님의 뜻만 좇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복종으로 이해된다면 다행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내 의지를 완전 폐기처분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내 생각 자체를 완전 포기한다는 것이 일견 거룩해 보이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지 심지어 가능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일단 소통이론으로 생각해봐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격적인 존재 간에서는,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게 전적으로 굴복한다고 해도 녹음기처럼 한 쪽의 뜻을 일방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항상 유기적으로 엮어져 있는 법(organically intertwined)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타이프라이터처럼 기계적으로 그 분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각 저자들의 실제 경험과 수집한 자료를 비롯해 그들의 문화적, 인종적, 성적, 교육적, 직업적, 기질적, 계급적 배경 등 모든 것이 성령의 영감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저자의 열등감, 부족한 인품, 직설적인 분노, 심지어 정치적 입장까지 고스란히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부정하다’거나 ‘인간적’이라며 차단하시지 않고 그 모든 것이 당신의 계시의 재료이자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들 있는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는 팔복을 소개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 반면 자신의 복음서 내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저자의 볼륨을 끄는 대신 그들의 각기 다른 ‘관심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그의 실망과 분노가 날 것 그대로 드러나며 그로 인해 주의 교훈이 한결 선명하게 도들 새겨지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또한 바울이 롬 13장에서 로마 정부를 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순복하라고 한 것과는 달리 사도 요한은 계 13장에서 로마를 음녀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의 신분적, 계층적 차이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계급의식 운운하면 ‘좌파적 성서 읽기’라고 몰아붙이곤 하지만 저자들의 직업의식과 민족의식이 성경에 반영된다고 믿는다면 그들의 계급의식만 쏙 빼놓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며, 일관성 없는 이러한 태도는 ‘사회정치적 성서 읽기’에 대한 친자본주의적 기독교의 거부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암튼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런 차이 덕분에 우리는 기록된 성경이 성령의 감동이 서린 말씀임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기적 영감설이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도 실은 똑같은 방식에 의거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코 우리의 의지, 생각, 입장을 당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덮어씌우는(overwrite) 분이 아니라 기꺼이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와 교감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당신의 생각과 어울리게 하시며, 우리의 입장을 당신의 입장과 마주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 내 욕망과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나의 생각’ 볼륨을 조금 더 올려서 ‘하나님의 뜻’ 볼륨과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 볼륨보다 더 커지면 안 되겠지만 말이죠.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노예가 주인이 던져주는 명령을 받듯이 하늘에서 떨어뜨려주는 음성을 맹신적으로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의 책 『변론자 그리스도』가 보여주듯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와도 시시비비를 밝히기를 원하시며(사 1:18, 공동번역) 이를 통해 당신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소돔성의 운명을 놓고 아브라함의 의견을 경청했던 하나님, 니느웨성과 박 넝쿨의 운명을 놓고 요나와 논쟁을 벌였던 하나님을 떠올려 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작업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는 마음가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 문제제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항의를 하거나 논쟁도 벌이면서 그렇게 인격 대 인격의 만남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복음과 상황 사이에서

 사진의 번째 문제점은나의 생각’ 옆에 있는세상의 소리’에서 발견됩니다. 사진을 이해할 때 세상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받드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문제없지만 자칫하면 자신이 속한 시대와 지역과 사람들에 대한 고려 없는, 즉 무중력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이야 어찌 됐든 하나님만 죽어라 찾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복음’(gospel)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상황’(context)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tension)을 살아내는 작업입니다.

 사도행전 13:36 의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되 자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NIV는 다윗이 자신의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섬겼다(David had served God’s purpose in his own generation)고 옮겼습니다. 자신의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은 대개가 공허한 종교적 레토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인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일을 생각해보면 왜 우리의 삶이 영원을 향하면서도 우리 시대에 충실해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좋은 책입니다. 저희 교회 학생들과 영문판 The Purpose Driven Life를 강독하면서 풍부하고도 강력한 성구 인용에 깊이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깊이 닻을 내린 그 책이 우리 시대를 통찰하려는 노력이나 그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찾는 노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든 ‘교회’이든)을 내건 40일짜리 캠페인, 특새, 큐티, 워크샵을 그렇게 많이 하는 데도 이 시대와 사회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이 전혀 증대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런 까닭일 지도 모릅니다.

  

코다: 긴장과 고통을 끌어안는

 나의 생각’ 없는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 없는 ‘하나님의 뜻’도 없습니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신앙이란 (1)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의지 사이의 긴장과 (2)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시대 사이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삶입니다. 저는 이를 ‘두 겹 줄의 긴장’(dual tensions)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에만 ‘올인’하는 것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지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이중적 긴장에서 발을 빼는 도피처로 악용되곤 합니다.

 나중에 깊이 있게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사실 예수 믿는 우리네 삶이란 긴장 속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긴장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교회와 세상, 은총과 자연, 내세와 현세 간의 팽팽한 장력을 기피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전자로 기울면 이원론이 되고 후자로 기울면 세속주의가 됩니다. 헌신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원론을 선택합니다. 이원론은 답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속이 아주 편합니다. 번민도 갈등도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나의 헌신이 부족한 것만을 탓하면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영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긴장에서 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원론을 선호하는 다른 까닭은, 긴장은 우리에게 구도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반면 이원론은 속 시원한 즉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저함도 없이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니 ‘불확실성의 고통’(the pain of uncertainty)―개혁주의 미학자의 거봉 캘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가 말한―을 줄여줍니다. 이 역시 나중에 깊이 있게 다를 기회가 있겠지만 신앙은 긴장이 주는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소명이나 거룩한 사역도 때론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룩한 일조차도 왜곡된 신앙의 도피처가 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2009년도 새해에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뜻은, 두 겹줄의 긴장과 불확실성의 고통이 촘촘히 박힌 것이기를 두 손 모아 빌어봅니다.

 Pasted from <http://minihp.cyworld.com/pims/board/general/board_view.asp?domain=&tid=20547206&board_no=21&search_type=&search_keyword=&item_seq=80465578&cpage=2&list_type=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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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하나님 나라

강성필 형제님의 질문에 관해서, 저도 많이 궁금해하고, 아직도 기회가 될 때마다 공부하는 내용이라서 제가 이해하는 것을 나눠보고 싶습니다. 참고로, 제가 견지하는 입장은 소위 ‘개혁주의’ 입장입니다. 아래의 설명은 신국원 저, [니고데모의 안경], IVP 에서 많이 가져왔습니다.

먼저 성경의 다른 이슈처럼 천국에 관한 이해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나누는 견해 또한 그 중의 하나이고요.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음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먼저 성경이 말하는 천국, 즉 하늘 나라(the kingdom of heave)는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와 동의어입니다. 성경과 초대교회 문헌에서 이 두 표현은 혼용(interchangeably)되었습니다. 어감을 생각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천국은 ‘세상 나라와 대립하는 초월성’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 땅에 임했고 또 장차 이 곳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란, 잃었던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라’라는 개념은 헬라어 ‘바실레이아’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기초합니다. [창조, 타락, 구속]을 지은 알버트 월터스는 바실레이아가 우선적으로 ‘영역 혹은 지역’을 뜻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오히려 나라의 의미는 지리적인 장소가 아닌 주권(dominion)과 왕의 통치권(sovereignty)입니다. 하나님 나라 역시 장소적 개념, 즉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실행되는 곳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의 원리가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곳에 임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실천하는 곳에 임합니다. 한 개인의 거듭난 마음과 몸이 그런 곳일 수 있으며, 한 가정과 직장이 그런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원칙적으로 그런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유형적인 무엇에만 임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도 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합니다. 기독교 학문이란 신학과 기독교 철학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공학이건 인문학이건 성경적 세계관과 전제에 입각한 경우를 모두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술도 성화나 성가 그리고 교회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경적 진리에 기초를 둔 예술 모두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권자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신약에서는 구속을 통한 우주적 주권의 회복이 강조됩니다. [하나님 나라] (Coming of the Kingdom, 엠마오 역간)을 쓴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그것이 “신약 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마 4:17)였다는 사실은 그 점을 증거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분명히 구분됩니다 (이 부분에서 주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 하시는 분들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의 차이는 삶에서의 큰 차이를 만들어내더군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큰 실재이며, 그 범위를 구속을 통해서 회복되는 세계 전체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반면, 교회는 한시적인 기구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고 나와 있습니다 (계 21:22). 거기에 교회가 따로 없는 것은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세우신 특별한 기구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경을 넓혀서 세상을 덮으려는 것은 중세적 발상입니다. 세상에서 교회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오히려 하나님 나라는 점점 축소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모든 능력과 자원을 교회 자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한다면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진정한 방법은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교와 성도들의 일상 생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임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already) “너희 안에 있다.” 언뜻 보면 동문서답 같습니다.

여기서 ‘너희 안에’를 뜻하는 헬라어 ‘엔토스’(entos)는 일반적으로 ‘속으로(into)’ 또는 ‘안에(in)’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는 너희 ‘가운데(among)’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즉 바리새인들 가운데 서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 중에 이미 있습니다. 이 나라는 구주로 오신 예수님의 초림과 그의 사역으로 이미시작되었고, 궁극적으로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완성될 나라입니다.

이런 사실은 바리새인들과의 또 다른 논쟁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트집을 잡던 자들과의 논쟁이 그것입니다.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듯이 사탄끼리 싸우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사탄보다 더 힘이 센 누군가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타락 이후 처음으로 하나님의 영이 통치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8).

타락 이후 사탄이 지배하던 질서는 물러가고 새 질서가 임했습니다. 타락 이후 세상을 지배하던 사탄이 그 파괴적인 권세를 잃었습니다. 창조 질서와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는 새로운 권세에 쫓겨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이전의 질서인 ‘죽음, 억눌림, 파괴, 질병’과는 다른 ‘회복, 생명, 자유’의 힘이 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많은 치유 이적이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놓임’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주신 증거의 말씀(마 11:4-5)에도 나타납니다. 그의 사역과 그의 나라의 근본은 ‘회복과 재창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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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 사건

(월요일) 창세기 11:1-9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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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개인적으로도 이 본문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 전공이 다름 아닌 [언어교육]이기 때문이죠. ^^

먼저 언어를 흩으심이 재앙이냐 축복이냐는 물음에서 저 또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의 계획을 흩으시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의 교만함과 자신들만의 계획으로 인해서 자멸했겠죠.

특히 이는 4절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영어 성경(NIV)을 보니까 “come, let’s build ourselves a city, with a tower that reaches to the heavens, so that we may make a name for ourselves and not be scattered over the face of the whole earth.” 라고 나오네요.

바벨탑 사건이라 통상 이름 붙여지지만, 이 사람들이 짓기를 원했던 것은 탑 이전에 도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 탑을 짓고 그 탑이 하늘에 닿도록 하게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람들의 분명한 목적은 그 뒤 so that 이후로 나오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였죠. make a name for ourselves 그리고 흩어지지 않는 것.

첫번째 목적인 make a name for ourselves는 몇몇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전쟁을 통한 정복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power & control을 이루려는 목적이라는 것이죠. 나름 상당히 정치적인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내길 원했습니다.

두번째 목적은 흩어지지 않는 것인데, 이것이 왜 문제냐면 이는 창세기 9장 1절에 말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요약하면, 바벨탑을 세웠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고, 또한 땅에 충만하라는 (혹은 흩어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도시 건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의 천국을 건설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죠.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때 처럼 사람들을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로 앞으로는 홍수 (혹은 자연재해)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이해됩니다.

어떤 학자는 이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으려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에 언어가 흩어지자 계획이 실패했다고 말을 합니다. 만일 권력과 컨트롤을 획득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집을 짓거나 커뮤니티를 위한 건설이었다면,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소통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을 하더군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언어와 그 언어가 담고 있는 힘에 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나는 언어사용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컨트롤하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우월하게 여기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가… 나는 소통하려고 하는가…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내는가 아니면 내 이름이 드러나는가, 쉽지 않지만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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