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분닥세인트들과 나누는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하나님의 뜻’이라는 도피처
박총 전도사(복음과상황 편집위원, [밀월일기] 저자)
예수 믿는 이들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마 ‘하나님의 뜻’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새해에는 평소보다 더 간곡히 우리네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지요. 이와 관련해 얼마 전 한 독자님의 홈피에서 발견한 사진 한 점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 뜻과 하나님 뜻 사이에서
첫 눈에도 은혜가 되고 아이디어도 신선합니다. ‘퍼가요~♡’를 남기며 얼른 담아가고픈 사진입니다. 하나님의 볼륨만 ‘on’으로 해놓고 나와 세상의 볼륨은 ‘off’ 시켜 놓으라는 의도는 누구든 충분히 이해가 될 겁니다. 근데 노파심인지는 몰라도 몇 가지 문제가 맘에 걸리는군요.
먼저 하나님의 뜻만 좇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복종으로 이해된다면 다행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내 의지를 완전 폐기처분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듭니다. 내 생각 자체를 완전 포기한다는 것이 일견 거룩해 보이지만 그것이 옳은 것인지 심지어 가능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일단 소통이론으로 생각해봐도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격적인 존재 간에서는,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게 전적으로 굴복한다고 해도 녹음기처럼 한 쪽의 뜻을 일방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항상 유기적으로 엮어져 있는 법(organically intertwined)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타이프라이터처럼 기계적으로 그 분의 음성을 받아 적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각 저자들의 실제 경험과 수집한 자료를 비롯해 그들의 문화적, 인종적, 성적, 교육적, 직업적, 기질적, 계급적 배경 등 모든 것이 성령의 영감과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저자의 열등감, 부족한 인품, 직설적인 분노, 심지어 정치적 입장까지 고스란히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부정하다’거나 ‘인간적’이라며 차단하시지 않고 그 모든 것이 당신의 계시의 재료이자 통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들 알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는 팔복을 소개하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한 반면 자신의 복음서 내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 누가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저자의 볼륨을 끄는 대신 그들의 각기 다른 ‘관심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는 그의 실망과 분노가 날 것 그대로 드러나며 그로 인해 주의 교훈이 한결 선명하게 도들 새겨지는 효과를 얻게 됩니다. 또한 바울이 롬 13장에서 로마 정부를 하나님의 종으로 보고 순복하라고 한 것과는 달리 사도 요한은 계 13장에서 로마를 음녀로 표현하는데 이러한 차이점은 두 사람의 신분적, 계층적 차이가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계급의식 운운하면 ‘좌파적 성서 읽기’라고 몰아붙이곤 하지만 저자들의 직업의식과 민족의식이 성경에 반영된다고 믿는다면 그들의 계급의식만 쏙 빼놓는 것은 분명한 모순이며, 일관성 없는 이러한 태도는 ‘사회정치적 성서 읽기’에 대한 친자본주의적 기독교의 거부감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암튼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이런 차이 덕분에 우리는 기록된 성경이 성령의 감동이 서린 말씀임을 확실히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기적 영감설이 왜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도 실은 똑같은 방식에 의거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코 우리의 의지, 생각, 입장을 당신의 주권적인 뜻으로 덮어씌우는(overwrite) 분이 아니라 기꺼이 우리의 의지를 당신의 의지와 교감하게 하시고, 우리의 생각을 당신의 생각과 어울리게 하시며, 우리의 입장을 당신의 입장과 마주치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절대 내 욕망과 계획을 포기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나의 생각’ 볼륨을 조금 더 올려서 ‘하나님의 뜻’ 볼륨과 어우러지게 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지 아닐까요? 물론 ‘하나님의 뜻’ 볼륨보다 더 커지면 안 되겠지만 말이죠.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노예가 주인이 던져주는 명령을 받듯이 하늘에서 떨어뜨려주는 음성을 맹신적으로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의 책 『변론자 그리스도』가 보여주듯 예수님은 당신의 뜻을 강제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와도 시시비비를 밝히기를 원하시며(사 1:18, 공동번역) 이를 통해 당신의 뜻이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소돔성의 운명을 놓고 아브라함의 의견을 경청했던 하나님, 니느웨성과 박 넝쿨의 운명을 놓고 요나와 논쟁을 벌였던 하나님을 떠올려 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작업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는 마음가짐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 문제제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항의를 하거나 논쟁도 벌이면서 그렇게 인격 대 인격의 만남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복음과 상황 사이에서
사진의 두 번째 문제점은 ‘나의 생각’ 옆에 있는 ‘세상의 소리’에서 발견됩니다. 사진을 이해할 때 세상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받드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문제없지만 자칫하면 자신이 속한 시대와 지역과 사람들에 대한 고려 없는, 즉 무중력 상태에서의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세상이야 어찌 됐든 하나님만 죽어라 찾는 것이 아니라 불변하는 하나님의 ‘복음’(gospel)과 끊임없이 변하는 우리의 ‘상황’(context)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tension)을 살아내는 작업입니다.
사도행전 13:36에 의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되 자신의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NIV는 다윗이 자신의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섬겼다(David had served God’s purpose in his own generation)고 옮겼습니다. 자신의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사회적 진공 상태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뜻은 대개가 공허한 종교적 레토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2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인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일을 생각해보면 왜 우리의 삶이 영원을 향하면서도 우리 시대에 충실해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릭 워렌의 『목적이 이끄는 삶』은 참 좋은 책입니다. 저희 교회 학생들과 영문판 The Purpose Driven Life를 강독하면서 풍부하고도 강력한 성구 인용에 깊이 감탄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성경에 깊이 닻을 내린 그 책이 우리 시대를 통찰하려는 노력이나 그 맥락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찾는 노력이 턱 없이 부족했다는 사실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든 ‘교회’이든)을 내건 40일짜리 캠페인, 특새, 큐티, 워크샵을 그렇게 많이 하는 데도 이 시대와 사회를 향한 교회의 영향력이 전혀 증대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이런 까닭일 지도 모릅니다.
코다: 긴장과 고통을 끌어안는 삶
‘나의 생각’ 없는 ‘하나님의 뜻’은 없습니다. ‘세상의 소리’ 없는 ‘하나님의 뜻’도 없습니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신앙이란 (1)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의지 사이의 긴장과 (2) 그리스도의 복음과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시대 사이의 긴장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삶입니다. 저는 이를 ‘두 겹 줄의 긴장’(dual tensions)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뜻에만 ‘올인’하는 것이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지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는 이중적 긴장에서 발을 빼는 도피처로 악용되곤 합니다.
나중에 깊이 있게 다룰 기회가 있겠지만 사실 예수 믿는 우리네 삶이란 긴장 속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긴장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이 교회와 세상, 은총과 자연, 내세와 현세 간의 팽팽한 장력을 기피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전자로 기울면 이원론이 되고 후자로 기울면 세속주의가 됩니다. 헌신되었다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원론을 선택합니다. 이원론은 답이 딱 떨어지기 때문에 속이 아주 편합니다. 번민도 갈등도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나의 헌신이 부족한 것만을 탓하면 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영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긴장에서 오는 창조적 에너지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원론을 선호하는 또 다른 까닭은, 긴장은 우리에게 늘 구도하는 자세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반면 이원론은 속 시원한 즉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주저함도 없이 명쾌한 결론을 내려주니 ‘불확실성의 고통’(the pain of uncertainty)―개혁주의 미학자의 거봉 캘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가 말한―을 줄여줍니다. 이 역시 나중에 깊이 있게 다를 기회가 있겠지만 신앙은 긴장이 주는 불확실성의 고통을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소명이나 거룩한 사역도 때론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룩한 일조차도 왜곡된 신앙의 도피처가 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2009년도 새해에 우리가 찾는 하나님의 뜻은, 두 겹줄의 긴장과 불확실성의 고통이 촘촘히 박힌 것이기를 두 손 모아 빌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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